배우는 일상

1주년 기념일

주인장 무순 2023. 12. 9. 2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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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가 없는 공허함
비어있음이 완성된 상태이다
 
내일이면 호주에 온지 1년이 된 날이다.
나 스스로 약간 일년동안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나름 정리를 해보고자 한다.
 
 
1. 서서히 독립
사실 아직 한국에 계신 부모님의 도움을 받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완전 독립이라는 말은 못 쓰겠다.
하지만 한국에 살았을 때에 비해서 나는 꽤나 독립적으로 살고 있다. 누군가는 들으면 대체 지금까지 얼마나 공주님처럼 살았던 거야? 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글쎄... 딱히 공주도 아니었고 의존적인 타입도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어릴 때부터 또래에 비해 독립적인 편이었다. 다만 어릴 때부터 당연하게 숨쉬듯 주변에서 해주던 것들이 생각보다 많았다는 걸 호주에 와서 깨달았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았던 것들을 스스로 하기 시작했다.
호주에 와서 처음으로 휴대폰 요금을 혼자서 내기 시작했다.
호주에 와서 처음으로 온전히 내 생활비를 내가 번 돈으로 충당하기 시작했다.
그 후에는 혼자 방을 보러 다니고 쉐어하우스를 계약했다.
그 후에는 혼자 집을 보러 다녔고 내 이름으로 작은 아파트를 렌트했다.
처음으로 내 명의로 수도세, 전기세를 내기 시작했다.
사업자 등록을 했고, 디자인 창업을 시작했다.
 
아직도 수많은 일들을 하고 있고 해야한다.
매 순간이 바쁘고 지나고 보면 바쁘지 않았던 주는 없었다.
그저 바쁜 일상 속에서 순간 순간 찾아오는 여유를 즐기고, 최대한 양질의 여유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하는 중이다.
 
2. 정신 건강
나는 정신적 상처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천천히 쌓이기만 해서 이게 상처인 줄 알았을 때는 이미 흉이 너무 커져버린 상처다. 언제 어디서 받은 상처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상처다. 아주 오랜 기간 다양한 사건들로 인해서 만들어진 내 상처는 지금도 돌아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고 내 마음 속 깊은 곳의 수만가지 불안감을 자극시킨다. 이 상처는 내 콤플렉스이자 내가 평생을 극복해나가야할 숙제이기도 하다.
 
호주에 오기 전 엄마, 언니와 함께 한 집에 살았다. 코로나는 우리가 다시 한 공간에서 함께 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우리는 종종 우리가 겪었던 경험들을 공유하고 상처를 터놓고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농담으로 우리가 이렇게 웃으면서 우리들의 상처에 대해 수다 떠는 건 집단 상담 세션이라고 말했는데, 사실이었다. 내 정신 건강에 엄마, 언니와 함께한 시간은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러한 시간들은 사실 나에게 무모한 용기를 주었다. 이렇게 내 편인 사람들과 함께라면 이 세상 모든 상처도 다 극복할 수 있어! 라는 무모한 용기.
이러한 용기를 기반으로 인생 첫 타지 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호주 생활 도중 다시 한 번 트리거가 되는 일이 생겼고, 이번에는 거주 문제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내 머릿속은 그야말로 터졌다. 심지어 학교는 최종 과제 제출을 앞두고 매우 바쁜 상태였다. 게다가 엎친 데에 덮친 격으로 스토커가 생겨서 스토커 신고까지 감행했다.
이 시기에는 시티를 걸어다니는 내내 길거리에서 미친 사람처럼 우는 일이 다반사였다. 아직 호주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길에서 울다가 아는 사람을 보면 그걸 어떻게 다 설명할 것인가...
하지만 한 편으로는 지인들 덕분에 다시 한 번 힘을 얻었다. 지낼 곳이 없으면 본인이 휴가 간 동안 본인 아파트에서 살라고 했던 매니저, 편하게 와서 자고 가라며 자기 방 키를 선뜻 건내준 학교 친구, 스토커 신고를 도와준 로컬 친구, 내가 힘들다는 말에 당장 만나 밥도 사주고 짐 맡길 곳이 필요하면 말하라고 해준 고향 친구까지. 당시에는 마음에 여유가 없어서 눈에 뵈는 게 없었다. 거주지가 정해지고 나서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여유가 생기니 고마운 사람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 누울 자리가 이렇게 중요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10년 전에도 내 일기에는 내 정신 상태에 대한 글이 적혀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나는 내 안의 상처를 인정했고 더이상 부정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 더이상 이 상처로 인해 나 스스로를 비관하기 보다는 상처가 아닌 나 자신에게 좀 더 집중하기로 다짐했다. 상처는 상처고, 나는 나다. 더이상 상처에 잡아먹히고 싶지 않다.
 
3. 학업
나에게 학업은 크게 두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영어 공부와 학교 공부. 영어 공부는 거의 취미 마냥 매일 하고 있다. 취미 마냥 한다는 말의 뜻은 그만큼 적절하게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이기도 하다. 매일 팟케스트를 듣고 내 모든 알고리즘은 영어 공부 영상으로 도배가 되어있지만, 적절하게 시간을 투자해서 정기 루틴으로 만드는 것은 지금까지 계속 실패해왔다.
학교 공부는 혼신의 힘을 갈아 열심히 했다. 계속 밤을 새고…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보면 어느새 수업 시작 1시간 전이었다. 덕분에 부족한 영어 실력에도 불구하고 준수한 성적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성적은 늘 그랬듯 나의 자기 효용성을 증명하지 못한다. 성적은 성적일 뿐, 기준이 명확한 채점표는 그 기준만 충족하면 마치 내가 완벽한 사람처럼 보이게 만든다. 하지만 현실은 그게 아니지. 쓸모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기준을 만들고 거기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지나고 보니 다사다난했던 일 년이었다. 앞으로 다가오는 일 년도 보람차고 이룬 것이 많은 한 해이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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